"마리아와 요셉은 아들 예수가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마리아와 요셉은 아들 예수가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성령이신 마리아의 종말심판과 천년왕국!"
<성령 마리아 교회>
예수의 나사렛 가정은 해마다 유월절(과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절기를 지내고 나사렛으로 돌아왔지요. 예수가 12살 되었을 때에도 그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그만 예수의 부모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저는 아주 오랫동안 '그 부모가 어떻게 예수를 잃어버릴 수가 있었나?'가 참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그 의문은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책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제 1권을 일고 그 궁금증이 풀려서 너무나 기뻤습니다. 궁금하시지요?
그 당시 나사렛에서는 요셉과 마리아의 친척들이 제법 여럿이 모여 살았었습니다. 요셉의 부모와 마리아의 부모가 모두 나사렛에서 살았고 그래서 요셉과 마리아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요셉과 마리아는 친척 관계입니다. 정확히 몇 촌인지는 제가 그 책을 본지 오래돼나서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리 멀지 않은 친척입니다. 그래서 그 친척들은 우리나라 집성촌처럼 곧 가족처럼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래서 유다,야고보,시몬,요셉 등 예수의 사촌들이 넓은 의미로 "형제"라고 불리고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개신교 신자들이 마리아의 평생 동정성을 부정하는 빌미를 만들게 되기도 합니다. 예수가 자라서 학교(우리나라 서당처럼 랍비가 마을 회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율법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을 때 마리아는 예수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직접 가르치게 되는데,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마리아가 성전에 자헌하여 사는 오랜 기간동안 (근 10년 정도) 율법(성경)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 때 마리아는 또한 알패오의 아들들 곧 예수의 사촌들을 맡아서 예수와 함께 가르칩니다. 그 중에서 유다와 야고보가 예수의 제자,사도가 되고요. 시몬과 요셉은 처음에 예수를 메시아로 믿지 않다가 나중에 믿고 제자가 됩니다. 이렇게 성경 속 이야기가 매우 자세하게 나와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더 궁금하신 분들은 책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적극 추천합니다. 강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나 <선 오브 갓> 등 영화를 통해 예수님을 더욱 실감나게 경험하였지만, 그 책은 그런 영화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고, 자세하고, 실감이 납니다!" 영화는 다분히 작가의 상상이 덧붙여진 "팩션"이지만 그 책은 보시면 바로 느껴지겠지만 "사실 그대로"입니다. 심지어 복음서가 쓰여진 시기가 예수님이 살던 때와 시간 차가 있어서 발생한 많은 오류들을 모두 걸러내며 읽을 수 있고 또 복음서에는 축약되어 실린 예수님의 설교 전문이 많이 실려 있어서 복음서의 진리들을 너무나 명확히 밝혀줍니다. 제가 책장사는 아니고요. 원래 하던 얘기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래서 가족같이 지내던 친척들이 모여 살던 마을 공동체가 명절에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남녀의 구별이 심하던 때라 남자는 남자들끼리 군집을 이루고 여자는 여자들끼리 군집을 이루어 그렇게 두 무리를 지어 따로 길을 갔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성별에 관계없이 아빠나 엄마 어느 쪽 무리에 붙어서 가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예수가 12살 되던 때에도 그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올 때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가 보이지 않았지만 응당 예수가 다른 쪽 무리에 섞여서 가고 있으려니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저녁 때에 두 무리가 다시 모였을 때 (저녁식사와 취침을 해야하니 남녀의 그룹이 당연히 모여야지요) 예수가 양쪽 무리에 없다는 것을 비로소 발견한 것입니다. 놀랍지요? 위의 책에는 이런 놀라운 이야기가 수없이 많습니다.
이런 놀랍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쓰려는 것이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원래 목적은 아닙니다. 그런데 꼭 한번은 말하고 싶었기에 기회를 노리다가 그 대목에 대한 글을 쓰게 되어 '기회는 이때다!'하고 이 이야기를 덧붙인 것입니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렇게 아들을 잃어버린 마리아와 요셉은 왔던 길을 돌아가며 만나는 사람들마다 아들을 보았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렇게 물어 물어 돌아가다 보니 사흘길이 걸린 것입니다. 급기야 예루살렘까지 돌아오게 되었고 마리아와 요셉은 육신적으로도 지쳤지만 그보다도 끝까지 왔는데도 아들이 보이지 않자 "낙심(절망)"으로 "초죽음"이 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혹시나 하고 성전에 들어갔는데 아뿔사 그곳에 예수가 있는 것입니다. 너무나 기뻤지만 그를 잃어버렸을까봐 너무나 노심초사하고 낙심(절망)했었기에,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거룩한 두 성인으로 공경하는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에게 버럭 "화"를, 혹은 수위를 좀 낮추어 말하다면 "책망"을 하게 됩니다.
얘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싹싹 빌어야 정상인 상황에 예수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말을 대답으로 줍니다.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이 '황당한' 대답에 - 성경을 읽는 우리에게는 이것이 황당하지 않지만 당사자들에게는 황당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제 밝힐 것입니다 - 부모는 이러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부모는 아들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였다.
전번 글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성경을 여러 번 읽다보면 궁금해해야 할 것도 타성에 젖어서 더이상 궁금해하지 않습니다. 이 대목도 그렇습니다. 성경을 아무 선지식없이 처음 읽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대목에서 의문이 발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대목 조금 전에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방문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를 잉태할 것이라 말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어서 낳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마리아는 예수가 메시아 곧 하나님의 아들임을 처음부터 알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누가 복음에는 안 나오지만 마태 복음에 보면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요셉이 파혼하려고 결심했을 때 천사가 그의 꿈에 나타나 그 아기가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라고 다시말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고 말해 주었기 때문에 요셉도 처음부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두 부모가 어떻게, 예수가 성전을 자기 아버지의 집으로, 곧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로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가 이 글이 말하려는 주제입니다.
분명 마리아와 요셉은 처음부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육신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한계 때문에 매일 매순간 그것을 의식하며 살기는 힘듭니다. 게다가 현대의 신자들처럼 아예 예수님이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으면 오히려 헷갈리지나 않을텐데 예수의 부모는 "여느 아기,아이와 똑같은" 예수를 "살을 맞대고" 키웠기에 그러한 사실을 잊고 지내는 시간도 생기고 세월이 오래되다 보니 그러한 시간들이 더 늘어났던 것입니다.
진짜 하고 싶은 얘기는 지금부터입니다. 그렇게 부모가 예수의 신적 정체성을 처음에는 간혹 가다 그리고 나중에는 종종 그리고 더 나중에는 태반을 잊고 지내게 된 데에는 위에서 말한 마리아와 요셉의 육신적(인간적) 한계가 한 몫을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예수가 그러한 사실을 부모에게 늘 일깨워주지는 않았다는 것이 더 결정적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성경의 위의 대목이 예수가 자신의 신적 정체성을 부모에게 일깨워주는 첫 에피소드일 것입니다. 그랬기에 부모의 기억에 각인되었고 성경 저자에게 전하여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그 때까지 부모에게 자신의 신적 정체성을 알리지 않은 것은 과연 자신 스스로도 그것을 몰랐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아는데도 숨긴 것일까요?
물론 그 정답은 천국에 가서 예수님께 직접 물어봐야 알 수 있지만 이 땅에서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맥락을 따라가면서 말입니다.
예수는 처음부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곧 자신이 신성을 지녔다는 것을 "인성"이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예수의 인성은 원죄만 없을 뿐 우리와 똑같은 인성이기에 그러한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성장과 배움이 필요했습니다. 물론 신성이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인성을 깨우칠 수도 있지만 그것을 원하시지 않고 여느 인간과 똑같은 성장과정을 경험하기를 원하셔서 때가 되기까지는 신성이 인성에게 자신의 정체성과 능력을 계시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결합되어 있더라도 신성이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면 인성은 그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인성이 충분히 성장하고 배워서 감당할 수 있게 되었을 때에 신성이 인성에게 자신의 신적 정체성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과연 그 최초의 시기가 언제였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아 모릅니다. 그러나 위의 에피소드가 있기 이전 곧 12살 이전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지요.
이것이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 글을 쓰게 된 궁극적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에게처럼 하나님(신성)이 성육신(육화) 곧 인성과 결합하게 되더라도 신성이 결합된 인성에게 "자기 계시"를 하지 않으면 인성은 그것을 모를 수가 있다는 사실은 또한 "성령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오신 성모 마리아"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그래서 성모 마리아의 경우에도 결합(육화)하신 신성(성령 하나님)이 인성에게 '자기 계시'를 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신성을 지녔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언제까지 몰랐고 언제 계시를 통해 알게 되었는가는 성경에 잘 나와있지 않아 알 수 없습니다. 이것도 천국에 들어가 물어보아야 알겠지만 메주고리예의 비츠카가 조만간 세상에 내어놓을 성모 마리아의 일대기 곧 새로 추가될 성경(관련 글; 1.http://blog.daum.net/mary-paul/9 2.http://blog.daum.net/mary-paul/14)이 나오면 거기에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성모 마리아는 평생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예수님과 달리 그분의 이 땅에서의 생애에 "공생애(공생활)"의 역할 곧 자신이 메시아임을 알리고 제자들을 키워내 교회를 세우는 역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그런 공생애적인 역할은 이제 그리스도교 교회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그분의 교회인 <성령 마리아 교회>를 세워서 그분의 시대요 왕국인 "천년왕국(요한계시록)"을 열도록 준비하는 지금에서나 드디어 필요한 것이니까요. 그런데 정작 그분의 공생애적인 역할이 필요한 지금 그분은 승천하시고 이 땅에 없으니 저 콘스탄틴(아바타)이 그분을 대신해서 그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이 땅에 사신 당시 공생애적인 역할은 없었지만, 1945년 암스테르담에 발현하셔서 자신이 "예수님과 더불어 공동구속자"라고 밝히심은, 그런 공생애적 역할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역할, 성육신(육화)의 가장 핵심적인 목적을 완수하셨다, 다시말해 예수님과 더불어 인류의 죄를 대신 기워갚는 희생제물로서의 역할을 동일하게 수행하셨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제물로서의 고통스런 삶을 사시고 죽음을 겪으시고 부활,승천하신 것이지요.
성령이신 마리아께서 이 땅에 사람이 되어오셔서 감당하셨던 역할은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가장 본질적이며 중요한 두 가지는 첫번째,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육신 곧 인성을 낳으시는 것이었고, 두번째, 예수님과 더불어 인류의 죄를 대신한 희생제물이 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이신 마리아는 예수님과 더불어 "메시아,그리스도,공동구속자,공동구세주"가 되십니다.
그리고 지난 2천년 동안은 예수님이 드러나시고 그분의 교회요 그분의 시대요 그분의 왕국이었다면 이제 임할 종말심판 후 이룩될 '천년왕국'에서는 성령이신 마리아의 교회인 <성령 마리아 교회>가 이 땅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하나님의 교회가 되고 성령 마리아의 시대가 되며 성령 마리아의 왕국이 될 것입니다. 아멘! 주 예수님과 주 성령 마리아여, 어서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성령이신 마리아의 종말심판과 천년왕국!"
<성령 마리아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