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인간(인생)의 본질
안식일과 인간(인생)의 본질
"사람이 되어오신 성령 마리아의
종말심판과 천년왕국!"
<성령 마리아 교회>
오늘은 주일입니다. 다른 이들은 오늘 직장,학교를 쉬고 또 신자들은 교회에 가는 날이지요. 그런데 저는 거꾸로입니다. 저는 거지(노숙자)라서 평일을 주일처럼 지냅니다. 그리고 주말에는 "노숙자 시설"이 문을 닫는 바람에 쉴 곳이 없어 마치 일을 하는 날처럼 힘든 날입니다. 그리고 <성령 마리아 교회>는 조직도 예배당도 없으니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비록 "그리스도교 교회 시대"에 살고 있지만 사실 영적으로는 이미 다음 시대 곧 "성령 마리아의 천년왕국 시대"를 살고 있는 <성령 마리아 교회> 신자이기에 이 시대에 "터잡고 집짓고 뿌리를 내려 안주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여겨집니다. 사실 "그리스도교 교회와 신자들"도 이 땅은 뿌리내릴 터전이 아니라 "나그네 길"이요 "파견지"이고 본향은 "천국"이지요. 하지만 "조직"을 만들고 "건물"들을 지으면서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현세적인 종교 집단"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성령 마리아 교회>는 이제 시작인데 시작부터 그들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뜻이 아닌가 합니다.
일전에 자주 여러번 주신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구약 성경 중에서 "너희가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고 성문을 들락날락하지 않으면 복을 줄 것이다"라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사실 안식일 법은 신약에 들어와서 폐지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일성수에 적용시키는 것은 비성경적이고 몰상식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철지난 안식일 지침에 대하여 제게 반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참 의아하고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반복되다 보니 결국 제게 주시는 참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안식일은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고 "(인생의) 본질"로 돌아가게 하는 장치로서의 역할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은 원죄적 성향 때문에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일"입니다. 소위 "워커 홀릭"이라고 하지요. 일을 할 때에 인간은 "성취욕"을 채우고 "자기 가치감"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나 우리나라처럼 "근면성"이 강조되는 곳에서는 그것이 더욱 강하고 심지어 일을 하지 않을 때에 반대급부로 심각한 "패배의식"이나 "자기 무가치감", "열등감", "자기 혐오감", "사회적 소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실업자들은 일하는 고역보다도 더욱 심한 심적 고통을 이고 삽니다. 그래서 현대 사회에서 "일"은 "우상"이 되기에 딱 적합한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산업화 (성장)시대를 맞아 아이를 양육하고 싶어하는 유부녀나 쉬어야 할 육신의 노인들에게까지도 노동을 강요하는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조직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예수회)이 인류를 자신들의 노예로 만들고자 계획한 전략 중 하나라는 것이 이미 그들의 계획서 "시온의정서"에 뚜렷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일을 하지 않으면(못하면) 심지어 "사회적 죄의식"마저도 짊어져야 할 지경입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라는 노동가도 있고, 성경에는 바울 사도의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말씀도 있지요. 물론 그 노동가는 일하지 않고 "돈(자본)"을 굴려 먹고사는 자본가들을 지칭하는 것이고, 바울 사도의 말은 "게으른 자"에 대한 말씀이지만 그 모든 말들이 결국은 "일하는 사람 = 사회적 가치가 있는 자"라는 도식에 사용될 뿐입니다. 프리메이슨이 만든 "프레임"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뭐라 말합니까?
첫번째의 "일"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에덴 동산"을 관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적 경영(주재)에 참여시킨 것이지요. 그렇게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므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결국 그 때의 일은 하나님께 대한 봉사요 찬양의 의미입니다.
두번째의 일은 아담이 타락하고 나서 "벌"로서 주어진 것입니다.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리라."
세번째의 일은 예수님이 오셔서 그런 벌로서의 일에서 해방시켜 주심으로서 첫번째의 일 곧 하나님의 신적 경영에 참여하여 하나님께 봉사하고 찬양하는 차원을 회복시켜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희생제사)에 동참하는 거룩한 희생의 사랑의 차원으로 승격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현대 산업화 사회가 인류에게 "세뇌시키는" 일의 의미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매우 저급한 것입니다. 이미 말했지만 그것의 궁극적 목적은 프리메이슨 곧 적그리스도의 충실한 노예들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구약 성경의 "안식일"의 율법은 신약 시대에 폐지되었지만 오히려 그 "내용"은 지금 이 시대에 구약 시대보다 더욱 절실히 요구되고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일하기 위해" 태어난 "일의 노예,천부적 노동자,사회의 부속품"이 아닙니다. 그것이 인간의 가치가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녀,백성"이라는 그 태생 정체성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지 그렇게 "기능적"인 면에서 가치가 매겨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물론 "게으른" 것은 죄악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여러 죄성 중의 하나일 뿐이지 "일을 하지 않으려는(싫어하는) 것"이 그 자체 하나만으로 인간으로서의 본질을 갖추지 못한 것처럼 간주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현대 산업화 사회는 인간으로서의 가치로서 그렇게 "일"을 가장 중요한 요소 심지어는 "본질"인양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일하기 위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고(드러내고) 찬양하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일"은 그 본질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방법" 중 하나일 뿐입니다. 예를 들면 아기,장애인,병자,노인들은 일을 할 수 없기에 현대 산업화 사회에서 그 가치를 폄하합니다. 아기야 나중에 노동자가 될 잠재성이 있으니 "투자"의 목적으로 가치를 둔다 하지만, 나머지는 앞으로도 일을 할 전망이 없으므로 "사회에 달려 있는 무거운 혹" 정도로 인식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일"로서만 자신의 본질 곧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오히려 그 본질이 가장 위대하게 성취되는 때는 일을 할 때가 아니라 희생(당)할 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희생제사는 바로 그런 본질을 단적으로 잘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목수로서의 일이 인류를 구원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사지가 못박혀 움직일 수 없어 아무일도 하지 못하지만 그러한 고통과 죽음을 희생제사로 바침으로써 인류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현대 산업화 시대의 교회와 신자들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역설"로 비칩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러니 현대 교회가 본질에서 한참 벗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대 교회는 눈에 보이는 "성취"를 우상으로 숭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제 영혼육을 2000년도에 "치셔서" 일할 수 없게 된 소위 "폐인"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고통은 다 거두어 주셨지만 능력은 되돌려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빌어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제 삶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성경 말씀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위에서 말한 안식일에 관한 말씀입니다. 신약 신자들이 안식일 규정을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안식일 규범이 내포하는 그 본질적인 내용은 시대가 바뀌었다고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의 본질은 "하나님이 본질,중심,전부이다"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본질이 아니고, 인간의 생활이 본질이 아니고, 인간이 하는 일이 본질이 아니고, 인간의 활동이 본질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이 본질이므로 인간은 비본질인 일,활동,생활 심지어 인간 자신에 매몰되어 우상숭배하지 말고 본질이신 하나님만을 추구해야 하며 혹여라도 주중에 일과 생활에 매몰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떠났다면 주기적인 안식일마다 그 모든 우상을 내려놓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 안식일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안식일 율법은 철저하게 일,생활,활동을 금하고 말씀읽고(듣고) 기도하는 영적인 일 곧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만을 허용하고 명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안식일의 본질은 사실 아직 산업화 시대 이전인 구약 시대보다도 현대의 산업화 시대에 더더욱 강조해야 하는 내용입니다. 물론 율법을 부활시켜 율법주의에 빠져서는 안되지만 그 본질적인 정신은 이 시대에 매우 강조해서 부활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식일의 본질과 주일의 본질은 다른 것이고 현대 신학자들이 어설프게 엮으려고 하는 시도는 두 가지의 중요한 본질을 왜곡시키고 희석시키는 매우 부정적인 시도라 하겠습니다. 주일의 본질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의 사랑입니다.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절기인데 그분의 부활도 결국 본질적으로 그분의 희생의 사랑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라는 본질을 추구하는 면에서 안식일의 본질과 궁극적으로는 같다고 우길 수도 있겠으나 그건 궤변입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제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구약의 안식일에 대한 말씀을 거듭 주신 것은, 제가 비록 현대 산업화 사회와 그것에 부응하고 있는 현대 교회가 요구하는 "생산적인" 사람이 아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인간으로서의 본질, 인생의 본질을 충실히 살아내고 있는 사람이라는 "확증"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십수년전 그렇게 하나님께서 제 직업적 능력을 거두어 가셨을 때로부터 지금까지 "어쩔 수 없이(?)" 하나님과 하루하루 "시간을 함께 보내고(킬링 타임?)" 있습니다. 직업적 능력 중에서 매우 중요한 대인관계의 능력도 거두어 가셔서 남들하고 어울리지도 못하게 되었기에 더더욱 그러합니다. 남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하루하루 얻어먹고 할 일이 없어서 혹은 일하기 싫어서 하루죙일 빈둥빈둥 노는 거지(노숙자)로 비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그리고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고 함께 산책하는 것처럼 그렇게 인간,인생의 본질을 충실히 살아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에녹에 대한 말씀도 많이 받았습니다. 휴거에 대한 약속도...
원래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주제는 따로 있는데, 관련없는 도입부를 애피타이저처럼 가볍게 언급하려다가 결국 그것이 이 글의 주제가 되어버렸네요. 하지만 이리된 것도 하나님의 섭리인 듯 합니다. 이 내용에 대하여 글을 쓴 적이 없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사실 내일 이후로 이 블로그에 글을 쓰기가 매우 어려워졌습니다. PC방 갈 돈이 없어서 공공장소의 인터넷 서비스를 사용하여 이 블로그의 글들을 써왔는데 내일부로 컴퓨터를 철거합니다. 공공기관에서 운영하던 것이 아니라 광고업체가 계약을 하고 운영하던 것인데 내일부로 계약일이 끝나고 갱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일부터는 글을 쓰기 어렵게 되었고 - 다른 공공장소의 컴퓨터들도 시도해 보았는데 무척 사용하기가 어렵습니다 - 어쩌면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습니다. 그런데 종말심판이 코 앞에 닥쳤고 또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 말씀도 다 전해서 더 이상 글을 쓸 필요가 없어졌는지도 모릅니다. 원래 쓰려던 주제의 글은 바로 다음 글에 쓰겠습니다.
제가 사용하는 공공장소의 컴퓨터는 서서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글이 길어지거나 여러개를 쓸 때는 수시간을 그렇게 서서 작성해야 하기에 다리가 너무 아퍼서 하나님께 앉아서 작성할 수 있는 컴퓨터 시설을 부탁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신문 기사 하나를 대답으로 주셨습니다. 그 기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미국 이야기인데, 교실에서 의자를 없애는 학교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기사와 사진이었습니다. 의자를 없애고 서서 수없을 듣고 공부를 하니까 학생들이 "집중력"이 더 커지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미국 학교의 "자유로운 수업 분위기"는 익히 잘 알려져 있지요. 그런데 의자가 없어지니까 앉아서 할 수 있는 많은 자유로운 개인적 행동들 - 예를들면 잔다든지, 딴 생각 한다든지 등등 - 을 할 수 없게 되니까 결국 수업과 공부에 집중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 기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말씀은, 제가 쓰는 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인데 제 "희생"이 담겨야(덧붙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희생은 사랑이고 그렇게 희생의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자칫 단지 지식을 전하는 지적 활동에 그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또한 그런 육체적 고통 자체가 육을 누르고 영을 활성화시키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되어오신 성령 마리아의
종말심판과 천년왕국!"
<성령 마리아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