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보화가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
사람이 되어 오신 성령 마리아의
종말심판과 천년왕국!
이 땅의 모든 보화는 결국 사라지고 말 것들입니다. 내 육신 생명도 건강도 젊음도, 육신의 안락과 쾌락도, 마음의 즐거움과 기쁨과 행복도, 부귀와 공명과 권력도 모두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내 육신이 죽어 관 속에 들어갈 때, 한줌의 흙으로 돌아갈 때 말이지요. 그렇게 사라지는 보화들은 본질적으로 허망한 것입니다. 영원하지 않고 그렇게 시간 안에 잠시 존재하는 것들은 본질적으로 허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본질을 감추고 마치 그러한 것들이 영원하고 그래서 허망하지 않다고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며 속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매번 속습니다. 옷이, 차가, 집이, 배우자가, 명예가, 권력이 자신을 영원히 본질적으로 행복하게 해 줄 것으로 속아서 그것들을 취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취한 후 대부분의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그것이 허망한 것이고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또 다시 이 땅의 허망한 것을 다시 찾습니다. 종류만 바꾸어서 말이지요. 그렇게 매번 같은 체험을 해도 인간은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끝없이 이 땅의 보화로 자신의 본질적인 허망함을 채우려 합니다.
결국 자신의 죽음과 함께 그 모든 것들이 허망해짐을 깨닫게 되면 이제 자식들을 마지막 보화로 삼습니다. 자신의 씨(유전자)로 만들어졌기에 내 분신이자 또 다른 나 자신인 것이지요. 그래서 내 육신은 늙어 죽더라도 또 다른 나 자신인 자녀들을 통해 내가 계속해서 죽지 않고 이 땅에 살 수 있겠다는 소망입니다. 그것은 짐승과 식물들에게도 그 유전자에 심어놓으신 본능이지요. 개인에게는 죽음의 허망함을 극복하고 영생의 소망을 그런 방식으로 실현하고 사회 차원에서는 종족보존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이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자식을 먼저 보내는 경우 그런 소망이 좌절되기 때문에 그 허망함을 견디기 힘들어 하는 것입니다.
비록 임종의 자리에서 자녀들과 손주들을 보면서 자신의 생명이 그들을 통해 영속되리라고 생각하며 허망함을 극복하고 안도감 속에 생을 마감하는 것을 큰 복으로 여기지만 그것은 크나큰 착각입니다.
자신의 삶이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자녀 또한 머지않아 똑같이 죽음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을 이을 손주들 또한 그러할 것입니다. 내 씨가 영원히 이 땅에 이어나가서 그 방식으로 내가 이 땅에서 영속하겠다는 생각이나 본능 자체가 매우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것은 짐승들과 식물들과 같은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지요. 하긴 많은 종교들 특히 동양종교들이 인간이 자연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니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나는 죽어 사라져도 자연 속으로 귀속되어지면 영원히 존재할 자연의 영생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러나,
인간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죽어 사라질 허망한 육신이 전부가 아닙니다. 육신이 전부라면 위에서 말한 것처럼 온갖 방법으로 그 허망함을 극복하고자 용을 써봐도 결국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육신 더 나아가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는 물질 자체가 물질 세계 자체가 그 본질이 허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간 안에 존재하는 것은 시작과 끝이 있고 그것은 곧 찰나적인 것이며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고 결국은 소멸될 것으로서 그 본질은 허무한 것입니다. 석가모니는 그것을 뛰어난 직감력으로 깨달은 것이지요.
그러나,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죽어 없어져서 허망한 육신만의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짐승들과 식물들과는 달리 허망하지 않은 존재입니다. 그것은 소멸될 육신 때문이 아니고 죽지 않고 소멸되지 않는 인간의 영혼 때문입니다.
이런 본질을 일찍 깨달으면 일찍 신앙에 귀의하게 되고 허망한 이 땅의 보화들에 희망을 두며 속지 않고 영원한 보화 그래서 진짜 보화인 내 영혼과 하나님과 내세의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에 희망과 행복의 근거를 두게 되고 그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자녀들에 대하여도, 신앙을 갖기 전에는 내 분신으로서 내 삶의 연장이라고 생각하기에 매우 강하게 집착하게 됩니다. 내 영생을 지속하게 해 주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곧 나 자신이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자녀가 살 길 바라고 그래서 강요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을 갖게 되면, 비록 육신으로는 내 씨(유전자)이지만, 그 육신이라는 것 자체가 허망한 것임을 알고 그것을 통한 영속이 허구임도 알기에 집착과 미련을 버리게 되어서, 자녀들을 내 영속의 수단으로 내 분신으로 또 하나의 나 자신으로 여기기를 거부하게 되고, 나와는 독립된 한 '영혼'으로 보게 됩니다. 어차피 육신으로는 나나 자녀나 다 허망하기에 그것에 연연해 하지 않고, 본질인 영혼을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 영생은 육신의 혈육관계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께서 한 영혼 한 영혼을 개별적으로 친히 창조하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인간에게 영혼을 담기 위한 육신이 필요하고 육신을 받는 방식은 짐승들과 같은 방법으로 질서지우셨기에 혈육관계가 생겨났을 뿐, 육신이 인간의 본질이 아니듯 혈육관계도 인간에게 본질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인간의 본질이 영원한 영혼이기에 인간에게 본질적인 관계도 영원한 관계 곧 하나님과 영혼의 관계 뿐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제대로) 있는 부모자식 관계와 신앙이 없는 부모자식관계는 그렇게 완전히 다를 수 밖에 없고 그것은 하늘과 땅보다도 더 큰 차이를 보입니다.
신앙이 있는 부모나 자녀라면 가족을, 같은 씨를 지니고서 육신적으로 영생(영속)하기 위한 운명공동체로 보지 않고, 그저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어 영혼이 구원받고 영생을 얻도록 해 주어야 할 독립된 인격체로 보게 됩니다.
혈육으로 관계지워진 것도 바로 그러한 영적 의무, 사명에 따른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내 씨를 통한 육신적 영생이 목적이 아니라 내가 자녀에게 육신 생명을 내어주었듯이 그의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나(부모)에게 그 자녀의 영혼을 맡겨 주신 것이지요. 그래서 신앙이 있는 부모는 자녀에 대하여 육신 생명을 주고 기르고 보호하는 육신적 의무보다 영적 생명을 얻도록 인도하고 도와주는 것이 더욱 본질적인 의무라 하겠습니다.
신앙이 없는 부모라면 그런 사명을 감당할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으며 심지어 자신의 영혼 자체가 그런 참된 생명을 얻지 못한 상태이므로, 결국 신앙을 갖게 되어 참 생명을 먼저 얻게 된 자녀가 도리어 부모의 구원을 인도하고 도와야 합니다. 그것은 부모에게 육신의 생명을 받은 은혜를 영생으로 갚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경우 사실 부모가 자녀보다 더욱 큰 것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 생명은 육신 생명에 비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와 비슷한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유대인 형제들이 영적인 것을 여러분에게 주었기에 여러분은 물질로 그것을 보답하는 것입니다"
"네 보화가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을 방금 전에 주시면서 이런 설교를 내려주셔서 다른 이들에게 전하라는 강한 충동으로 스마트폰 자판을 어렵게 두드리며 올립니다. 부디 많은 분들이 참된 보화 영원한 보화 곧 하나님을 만나 받게 되는 영생을 얻는데 도움이 되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성령 마리아 교회> 창립자(반석), 목자 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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