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 과연 성경적인가?
"성령이신 마리아의 종말심판과 천년왕국!"
<성령 마리아 교회>
몇년 전 큰믿음교회에 다녔을 때이다. 변승우 담임목사는 자신의 말마따나, 장사치들인 목사들과는 달리, 설교 때에 헌금에 대하여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건 매우 성경적이다. 그리고 다른 교회들과는 달리 예배 시간에 헌금 시간을 두고 헌금을 걷지 않고, 예배당 뒷편에 헌금함을 놓아 두어 신자들이 입당할 때 개인적으로 넣게 하고, 예배 때에는 헌금을 봉헌하는 기도만 한다. 그것도 너무나 성경적이라고 생각하고 또 너무 좋았다.
또 변승우 목사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재산(부)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이며 부(재산)가 신자 자신의 것이 절대 아니고 그렇게 생각해서는 절대 안된다고 말한다. 청지기로서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사용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것까지도 너무나 성경적이고 좋았다.
그런데 그 연장선 상에서 변승우 목사는 "십일조"는 "성경적인" 것이고, 자신의 재산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십일조라고 말한다. 그래서 십일조는 헌금의 기본이고 중요하다고. 심지어 구약에서 십일조는 소출(수확)의 십일조였으므로 현대에는 "매출액"의 십일조가 맞다고 한다.
하지만, 거기서부터는 수긍이 되지 않았다.
십일조가 성경적인 것이냐 아니냐는 이미 개신교계 안에서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오던 것이고, 결론은 "구약성경적"이되 "신약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유대교회가 아니고 그리스도교 교회이고 신자인 이상 구약성경적인 십일조가 중요하거나 심지어 의무일 수는 없다.
변승우 목사도 인정하는 바, 신약시대 곧 그리스도교 교회에서는 구약의 율법 중에서 의식법(유대교 종교 의식에 관한 법)은 폐해지고 도덕법은 아직도 유효하다. 그래서 대표적 도덕법인 십계명을 지금도 유효하게 여기고 지키고 있다.(단, 그중에 유일하게 안식일 계명만은 의식법이다. 신약시대에 안식일법이 폐지되었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주일은 안식일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므로 안식일을 대체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십일조"는 의식법에 해당될까 아니면 도덕법에 해당될까? 대답이 머뭇거려지는가? 세뇌를 심하게 당한 것이다. 십일조가 구약의 유대교만이 아니라 신약 시대에도 적용되는 도덕법일 수는 없다. 만약 구약의 헌금법의 일종인 십일조를 신약에서도 유효화하려면 구약의 헌금에 관련된 모든 법과 그 밖에 신앙에 관련된 모든 의식법들도 다 유효하게 지켜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 바로 변형된 "안식일법"인 "주일성수"이다. 그것에 대해서도 십일조와 마찬가지로, 주일을 안식일처럼 지내라고 의무지우는 근본주의적 교회들은 구약의 다른 모든 의식법을 부활시켜 지켜야 할 것이다. 안식일과 주일은 성경적,신학적 의미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것을 접목하는 신학적 시도를 하고 있는데 그래봤자 어디까지나 접목이지 "동일한" 의미가 아니다. 안식일은 구약 시대를 위한 것이고 주일은 신약의 그리스도교 교회를 위한 것이다. 안식일을 위한 성경 말씀,신학,규율과 주일을 위한 성경말씀,신학,규율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전통을 부정하고 성경을 따라가는 개신교가, 초기 교회가 주일을 안식일과 완전히 달리 인식하고 달리 지냈다고 성경인 사도행전이 명백하게 증언을 하고 있는데도, 초기 교회 이후에 형성된 "전통(관습)"을 - 그것은 그대로 가톨릭 교회에로 이어지게 된다 - 들어 안식일법의 실제적 부활을 꾀하는 것은 참으로 이율배반적이게도 "비성경적"이다. 십계명의 안식일 계명을 주일로 대체한 가톨릭 교회나 비록 명문화하지는 않았으나 실제적으로는 대체하여 가르치고 지키는 개신교나 둘 다 아직도 구약의 율법의 굴레에 스스로 매여, 예수님께서 새로 제정하신 "사랑의 율법"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신약의 모든 것은 구약의 것의 연장선 상의 것이 절대 아니며, 또 구약의 것보다 좀 더 우월한 것 정도가 아니고, "본질적으로" "거듭난" "새로운" 것이다. 비록 "모양(새)"가 같을 지라도 말이다.
구약의 백성들과 신약의 신자들은 그 "신분" 자체가 다르고, 구약의 유대교와 신약의 그리스도교도 그 "본질" 자체가 다르다. 구약의 제사,예배와 신약의 예배도 본질적으로 다르다. 구약의 신앙 내용과 신약의 신앙 내용이 본질적으로 다르다. 왜? 바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구속이 있고 없고의 차이 때문이다. 그분의 강생 구속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교의 모든 것은 비록 유대교의 것과 "모양새"가 같아 보일지라도 "근본적으로" "의미와 실재(실체)"가 다르다. 바로 이런 가장 기초가 되는 성경 지식을, 가장 성경적이라는 개신교가 사실상 제대로 소유하지 못하고 있음을 강력히 드러내는 것이 바로 "십계명 주일법"과 "십일조" 등 구약의 것들을 갖다가 사용하는 것이다. 물론 그 점에 있어 더 심한 가톨릭 교회를 개신교가 욕하지만, 개신교도 자신들의 "정체성"과는 매우 달리 그런 성경 무지한 면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구약의 헌금과 신약의 헌금은 "본질"이 다르다. 구약의 헌금, 그중에서 가장 의미가 강력하고 부담이 큰 십일조가 위에서 말한대로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그것을 인정하는 행위로서의 헌금이라면, 다시말해 주종의 관계의 계약을 확인,갱신하는 행위라면, 신약의 헌금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 심지어 목숨까지도 희생제물로 바치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와 응답의 사랑으로서 나의 모든 것 심지어 생명까지도 그분께 바치는 사랑을 상징적으로 헌물에 담아 바치는 행위라 하겠다. 그 의미가 하늘과 땅보다도 더 큰 차이가 있는데도, 그런 지극히 "성경적이고 기본적인 마인드"가 부족해서 변승우 목사와 큰믿음교회 및 개신교인들은 그렇게 오늘도 구약의 수준 낮은 헌금인 십일조를 강조(의무화)하고 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그런 맹점이 드러나기를, 십일조를 낸 다음에는 마치 세금의 의무를 다한 것처럼 생각하고, 이제는 나머지 돈이 마치 자신의 것인양 "안심하고" "맘대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십일조를 위에서 말한 대로 의무로 생각하기에 거의 대개는 그 이상(십이조,십삼조 등)을 바치지 않는다. 반면 십일조라는 의무가 아니라 사랑의 헌금을 하는 이는 - 진짜로 사랑을 담은 헌금이라면 - 십일조 그 이상을 바칠 수도 있다. 그런데 헌금,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십일조를 세금 내듯 하는 개신교계에서는 심지어 십의 구조인 자신의 몫을 두배로 늘리고 싶다면 십일조를 미리 두배로 내라고 "십일조 재테크"를 가르치는 목사들도 매우 많다. "세테크"를 벤치마킹해서 말이다. 실소도 나오지 않는다!
주일 성수 문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천지 창조, 인류 창조의 업적을 감사하고 기리는 안식일과,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시어 우리를 대신해 심지어 목숨까지도 희생제물로 내어주시고 돌아가신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멸망의 운명의 인류에게 영생을 회복시켜 주신 것을 감사하고 기념하는 주일은 "완전히" "본질"이 다르다. 주일의 본질을 안다면 구약 시대의 사람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감사와 사랑과 거룩함으로 주일을 지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겨우(?)" "의무조항(!)"들로 구성된 십계명의 안식일법을 대체하는 것으로 전락시킨다는 것은 성경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는 "성경의 소경들"이나 하는 짓이다.
또, 변승우 목사의 "성경적인(?)" 주장대로 "매출액"의 십일조를 바치려면, 지금같이 인건비도 뽑기 힘들고 대출 이자조차도 갚기 힘든 불황기에는 "빚"을 내서 헌금을 하라는 소리와 매 일반이다! 장사를 실속있게(?,교활하고 잔인하게!) 잘 한다는 대기업들도 현재 영업이익율을 5%도 달성하기도 힘든 때이다. 수익이 매출액의 5%도 안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들의 형편은 말할 필요도 없다. (참고로 현재 자영업자의 영업이익률이 1.6%라 한다. 그러니 어찌 매출액의 10%의 십일조를 내랴! 그리고 월급장이는 회사의 매출액 중에서 자신의 매출액을 도저히 산출해 낼 수가 없다. 그러니 그들은 무엇의 10%를 내랴? 대략난감!) 혹여 변승우 목사가 다른 기복 신앙을 전하는 목사들 마냥 "믿음으로 내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다"라고 궤변적인 변명을 늘어놓는다면,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그 말씀을 신자들에게 하기 전에 먼저 변승우 목사 자신에게부터 적용하라고 말이다. 본인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어서 그렇게 이단 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온갖 인간적이고 육신적인 방법들을 다 동원하고 있지 않은가? 본인에게도 없는 믿음을 어찌 신자들에게 강요하랴?!
구약 시대의 산업(주로 농업이겠다)은 지금보다 형편없이 그 기술이나 장비의 수준이 떨어져서 투입된 노동량에 비해 소출이 지금보다 현격히 떨어졌다. 게다가 세금(국세,지방세,인두세 등등의 각종세금)도 지금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 때에는 지금보다도 더욱 토지의 소유가 소수의 지주에게 몰려있어서 대개의 서민들은 모두 소작농이었고 상당 비율의 도조를 내야 했다. 그렇게 하고서 자신들에게 남는 것은 정말 "거의 없었다." 오죽하면 종자씨마저 먹었어야 했겠나. 그 당시 일반 서민은 실제로는 십일조를 그렇게 성경대로,율법대로 (모두) 내지 못했다. 십일조까지 내면 자신과 자식들이 굶어 죽을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가장 강제성(처벌)이 적은 십일조를 가장 나중에 일부만 내던가 안 낸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시대 상황을 사셨다. 그분은 그런 상황을 눈으로 매일 보셨을 뿐 아니라 심지어 자신도 목수라는 가난한 직업인으로 몸소 체험하셨다. 그런 분이 그렇게 착취당하여 목에 풀칠할 것도 부족한 이들에게 십일조를 의무처럼 강요하셨다고 생각할 수 없다.
십일조를 "성경적이라고" 강요(의무화)하려는 목사들이 근거로 내세우는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자.
먼저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다. 성경은 그것에 대해서 단순 기술을 하고 있을 뿐 어떤 의미나 해석도 부여해 놓지 않았다. 그래서 멜기세덱의 정체와 아브라함의 십일조 헌납의 행위는 "미스테리(신비)"로 남게 되었다. 성경은 그렇게 "미스테리(신비)" 투성이다. 그래서 그것들의 해석을 위해 여전히 "계시"는 필요하고 또 연구도 필요하다. 이후 시편에서 멜기세덱이 다시 언급된다.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반열)를 따라 영원한 사제(제사장)이니라"는 구절이다. 물론 예수님을 지칭한 말씀이다. 이 구절에서 드디어 멜기세덱이 제사장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근거로 튀어나온(?) 제사장인지 도통 알 수 없다.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의 예언은 충족시키시지만(요셉이 다윗 혈통이지만 양자인 예수님과 "혈통"의 관계가 아니므로, 요셉의 양자라는 사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예언의 성취의 조건에 합당하지 않다. 마태복음이 그 논리를 주장한 것은 성경에 기술된 매우 큰 "실수(실책)"이다. 성령 마리아가 다윗의 후손이기에 예수님은 다윗 왕가의 여왕의 아들로서 "다윗의 자손(혈통)" 조건을 충족시키게 된다. 이것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이미 다루었으니 관심있으면 참조하라: "또 다른 '다윗의 후손'인 성령 마리아"; http://blog.daum.net/mary-paul/173), 구약의 유대교회는 레위 지파 그중에서도 아론의 후손들이 제사장 그룹이었기에,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 되시기에는 혈통이 맞지 않으므로 그렇게 레위의 반차가 아닌 "다른 계통"의 제사장의 반열에 들어가실 필요가 있었다. 그럼에도 도대체 멜기세덱이 어떤 제사장인지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주제는 신약의 히브리서에 다시 등장한다.
여하튼 구약의 멜기세덱에게 헌납한 아브라함의 십일조에 대한 말씀은 이후 그 후손들 그리고 신약 교회에까지 적용되어야 한다는 언급은 전혀 없다. 구약 유대교에서의 십일조의 근거는 레위기 율법이지 위의 사건이 아니다. 그래서 더더욱 신약 교회에서 그것을 근거로 내세울 수 없다.
그 다음 십일조에 대한 성경의 언급은 그 실제적인 원천인 레위기 율법인데, 그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겠다. 신약 교회에서는 완전히 "폐지된 의식법"이니까.
그
다음은 말라기서인데, 그것도 레위기의 십일조법을 쉬이 어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것을 질타하고 십일조를 잘 지켰을 때의 보상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결국 레위기 십일조법의 부연 설명 정도에 불과하니 폐지된 의식법에 대한 이야기이고 신약 교회에 적용할 것이
못된다. 이 말라기 십일조 구절은 목사들에 의해 설교에서 매우 자주 인용,사용되는 구절인데, 주로
"축복신앙,번영신학,긍정신학" 곧 탐욕의 기복신앙을 설파하는 변질된 목사들에 의해서다. "창고(통장)에 쌓을 곳이 없도록
하나님께 복을 받고 싶은가? 그럼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를 떼어먹지 마라!"
그 다음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라 신약 성경의 근거라며, 매우 강력히 그리고 자주 사용되는 구절이다.
"박하와 회향 등의 십일조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하지만, 믿음과 의(義) 등의 마음적인 것도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그럼 이제 이 예수님 말씀을 깊이 살펴 보자. 위에서 말한대로 예수님은 십일조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지경으로 가난한 서민들의 삶을 잘 알고 계셨고 몸소 체험하신 분이시다. 만약 예수님께서 위의 말씀을 (잔혹하게도) 그런 서민들에게 하신 것이라면, "십일조"를 사랑하여(?) 역시나 가난한 서민들에게 십일조를 강요하는 목사들의 주장에 힘이 실릴 것이다. 하지만 위의 말씀은 그런 가난한 서민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부정하게 돈을 착취해서 부자들이 되고, 자랑하며 십일조를 척척 잘 내면서도 - 성전에서 그것을 자랑하며 기도하는 바리새인을 예수님이 언급하신 것처럼 말이다 - 그 심보는 똥통보다도 더 더럽고 추악한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변승우 목사가 강조하는 것처럼 성경의 문맥 - 예수님이 그런 발언을 하신 취지 - 으로 보면, 위 말씀은 십일조를 반드시 바쳐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한 발언이 아니라, 오히려 십일조를 내는 등 행위로는 율법을 잘 지키면서도 그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배신하는 바리새인의 위선을 질타하시기 위한 말씀이다. 그래서 이 구절을 인용하며 예수님이 십일조를 내라고 말씀하셨다는 증거로 삼는 것은 문맥을 무시하는 매우 "교활하고 궤변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행태라 하겠다.
이런 문맥적인 견해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는 바로, 예수님과 3년반을 동고동락하며 그분의 생각(사상)을 속속들이 배운 사도들의 발언과 행적을 증언하는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단 한 번도 십일조에 대하여 언급한 바가 없고 - 헌금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헌금에 대해서는 의외로 많이 언급된다. 그러나 십일조는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 그들이 쓴 서신들 안에 있는 신앙생활에 대한 매우 많은 구체적인 지침들 속에서도 십일조라는 단어는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비록 예수님과 동고동락하지는 않았지만 계시를 통해 매우 많은 진리를 전해 받은 바울 사도도 - 심지어 신약성경에서 그의 서신들이 사도들 중에 가장 많고 그래서 현재의 그리스도교 교회의 교리,신학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 자신의 서신들에 신자들의 신앙,생활지침에 대하여 매우 자세하게 계시를 받아 전하지만, 헌금,구제금에 대하여는 언급할지언정 십일조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히브리서가 바울의 저술이 아니라고 현대의 신학자들은 결론을 내렸는데, 바울의 것이라 해도 그것은 신자 생활에 대한 지침이 아니라 "신학저술"에 해당된다. 그래서 아래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히브리서에 나오는 십일조는 신학적인 의미로 거론된 것이지 신자들의 신앙 지침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다.) 목사들이 주장하듯 십일조가 그토록 성경적이고 중요하고 의무적인 헌금이라면 위에서 말한 성경의 모든 대목 중에서 적어도 한번은 언급이 되었어야만 그들의 주장에 조그만 힘이라도 실릴 텐데, 야박하게도(?) 성경은 일절 십일조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다.
또 이런 차원도 있다. 예수님께서 구약의 의식법들을 "의도적으로"- 그것을 폐하신다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 범하신 적은 없고 오직 그 법의 구체적인 행위를 지키는 것과 그 상위의 법인 마음과 정신의 법을 지키기는 것이 "상충될 때"에만 의식법을 어기셨다. 그랬기에 사도들은 그런 예수님의 실제 삶을 따라 초기에는 의식법들을 준수하였다는 것을 사도행전이 증언한다. 다시말해 예수님께서 구약의 의식법이 폐지되었다고 사도들에게 선언하고 승천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신실했던 사도들이 당장에 의식법을 쓰레기통에 집어 던졌을 것이다. 핍박이 온다해도 말이다. 조선의 가톨릭 박해는 교황청이 조상 제사를 금하자 윤지충이라는 신자가 조상 신위를 불태우고 제사 지내기를 거부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하물며 사도들이야! 초기 교회의 사도들과 유대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의식법을 한동안 지킨 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명백하게 의식법의 폐지를 말씀하신 적이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그것이 예수님 뜻이었을까? 아니라는 것을 다들 알지 않는가? 예수님이 그것까지 말씀하실 여건이 되지 않았다. 왜? 제자들의 영적 이해 수준이 너무 낮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이제 예수님을 대리해서 대신 교회를 이끄시게 될 성령님의 몫으로 넘겨진 것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고 제자들이 성령님의 강력한 임재와 은혜 가운데 "순식간에" 변화를 입게 되고 영적 수준이 높아졌다. 그래서 드디어 그 사실 - 구약 의식법의 폐지 - 을 이해할 수준이 되었을 때 베드로에게 비몽사몽 환상 체험으로 처음 계시를 시작하셨고, 그 다음은 바울을 통해 계시하셨고, 그 다음은 그 문제를 놓고 사도회의가 열렸을 때 사도들에게 영감을 주사 "확정"짓게 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이 사도들이 보는데서 그렇게 "십일조도 내야 하지만..."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해서, 구약의 의식법 중 헌금법의 하나인 십일조법이 신약 교회에서도 유효(지속)하도록 하신 것이 예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에서 말한 그런 성경의 기본적 맥락도 모르는 "성경의 바보 중의 바보"나 할 수 있는 생각이다.
그 다음은 히브리서의 말씀이다. 이 부분은 십일조를 강요하는 목사들에 의해서 거의 인용되어 사용되지 않는 구절이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신약의 신자들도 십일조를 내라고 하는 "명령,규율,지침"의 말씀이 아니라,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예수님이 레위 지파가 아닌데도 어떻게 대제사장이신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위에서 언급한 구약의 두 군데의 말씀을 인용하며 설명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구절을 가지고 신약 교회에 십일조가 존속할 근거로 사용할 수는 없다. 레위 지파의 제사장 반열도, 멜기세덱 제사장의 반열도 모두 그림자이며 다 사라졌고, 이제 예수님 대제사장만이 "실체"로서 유일하게 존재하시니까 말이다. 나에게 감정을 갖고 있는 큰믿음교회의 궤변론자 신자들과 지지자들이 이렇게 나에게 따지고 드는 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 하다.
레위 제사장도, 멜기세덱 제사장도 그림자라서 이제 사라지고 오직 실체이신 예수님 대제사장만이 남아 있다면, 그들에게 바친 십일조도 그림자라서 사라졌더라도 예수님 대제사장께 바치는 십일조가 이제 "실체"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냐?
매우 그럴 듯한 논리가 아닌가? 그러면 이렇게 대답해 주겠다. 과거에 "십일조"로 내는 "물질적인 헌물(돈)"도 "그림자"였고 그 실체는 그 그림자가 상징(예표)하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신자의 전 존재(소유 포함)"를 말한다. 실상 "십일조" 곧 십 중 일만 바치는 것 자체가 "봉헌"의 그림자일 뿐이다. "봉헌"이란 말자체가 이미 "'전(全) 존재'를 바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십일조라는 그림자의 실체는 "전 존재의 봉헌"이며, 십일조의 헌물(돈)이라는 그림자의 실체는 "전 존재"이다. 그래서 이제 실체만이 남아 있는 신약시대에는 십일조라는 그림자가 상징,예표하는 "봉헌"도 실체만이 남아 있고 그것은 "전 존재의 봉헌"이다.
그러면 궤변론자들의 이런 반론이 예상된다. 그렇게 신약 시대에는 실체만이 남아있다해서, 가산을 다 팔아 교회에 헌납하고 몸을 각을 떠서 태워 바치거나 모든 신자가 나지르인이 되어 신부,수녀들처럼 전적으로 봉헌된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고 말이다.
물론 그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신약 성경 자체가 증거하고 있다. 그러면 이제 실체만이 남아 있는 신약 시대에 "봉헌"의 "실체"를 어떻게 "실천"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실까?
그것도 신약 성경에 자세히 나온다. 그리고 구약처럼 "그림자,상징,예표"로서의 십일조를 바치라는 등의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이제 실체만이 남아있는 헌금을 실제 생활에서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많은 구절들을 내 나름대로 한마디로 종합해보면 이렇다.
나에게 맡겨주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한없는 사랑이 전적인 희생으로 마련해 주신 것이므로, 나도 전적인 희생의 사랑으로 전부 예수님께 돌려 드리되, 종인 내가 생활(생존)에 꼭 "필요한 만큼"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전부" 바쳐드린다!
이것이 실제 삶에 적용된 "봉헌"의 "실체"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돈(재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전 존재와 모든 소유에 해당된다. 내 몸, 시간, 힘, 능력, 지위, 명예, 가족 등 모든 것에 말이다. 이것을 실제 삶에 실천했던 한 사람을 알고 있다. 친분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들어서 알고 있다는 말이다. 김옥경 "집사"다. 그 외에는 거룩하다고 자부,자랑하는 큰믿음교회에서 그런 이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김옥경 "목사"가 지금도 그런 실체적 봉헌을 하는지는 난 모른다. "집사"였을 때의 일을 전해 들은 것이니까.
이제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위에서 좀 난잡하지만 나름 성경적으로 "십일조가 왜 성경적이지 않은지" 매우 명백히 논증하였다. 그래서 변승우 목사(큰믿음교회)가 십일조를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사실은 비성경적인 주장임을 입증했다.
역설이다! "오직 성경!"이 존재의 이유 그 자체인 개신교와 그 리더 중이 리더인 변승우 목사와 큰믿음교회가 너무나 "성경적이지 않다!" 그렇게 개신교가 유대교의 의식법(십일조, 십계명 주일 대체)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그 전통을 잇는 것은, 가톨릭교가 유대교의 전통(제사인 미사, 제사장인 신부 등등)을 상당히 물려받아 "유사(類寫) 유대교"가 된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신(新) 바리사이즘"이다!
변승우 목사가 이 마지막 시대에 대부흥(대추수)의 주요 사명자로서 세계에서 가장 탁월한 성경 해석과 설교의 은사자라는 것을, 직접 설교를 들으며 몇년을 체험하였기에, 확실히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위에서 밝힌 것처럼 십일조에 관한 변승우 목사의 성경적 관점에서의 견해는 명백히 "구약성경적인" 것이고 그래서 신약 교회가 받아들이기에는 명백히 "비신약성경적인" 것이다. 어쩌면 그 자신이 아직 구약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에게는 아직 예수님이 (개인적으로) 강림하지 않으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열망(갈망)이 그에게서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성령이신 마리아의 종말심판과 천년왕국!"
<성령 마리아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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